제 677 호 [책으로 세상 보기] 4, 67, 7834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 저자 채효정 출판사 교육공동체 벗 4, 67, 7834. 현 한국 사회의 대학생은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성인이라니, 칭찬이더라도 누군가 나를 그렇게 칭한다면 낯이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많은 교수 역시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단에 올라 연구, 강의하는 교수도, 이들에게 교육받고 토론하는 학생도 지성인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지성인은 누구인가? 이 책은 경희대학교 시간강사였으나 ‘해촉’된 채효정 해직강사가 경희대학교 캠퍼스 내 잔디밭에서 진행한 강의 내용을 토대로 쓰였다. 인문주의를 표방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는 모순적이게도 기업화가 거듭 진행되다가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 대학 재정난을 이유로 67명의 시간강사를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4, 67, 7834. 67명의 시간강사가 해고된 지 4년이 지났다. 촛불이 일어났고, 정권이 바뀌었다.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올해 8월, 전국 대학에서 총 7,834명의 시간강사가 실직했다. 촛불은 혁명이 될 수 없었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지도 못했고, 대통령만 바꿔놓았을 뿐 저항의 바람이 일터, 학교까지 불어오지도 않았다. 저자는 대학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 대학의 현실을 면밀히 진단한다. 지성인을 길러내야 할 대학에 왜 지성인이 단 한명도 없는 것인가. ‘대학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저자가 진단한 대학에는 놀랍게도 노동도, 학생도, 교수도, 교육도, 정치도, 주인도 없다. 노동하는 사람은 있으나 ‘노동자’는 없고, 배우는 ‘고객’은 있지만 ‘학생’은 없다. 사회에 유의미한 담론을 제시하고 모순구조를 지적해야할 대학의 역할은 온 데 간 데 없고, 돈을 따내기 위한 비즈니스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정부, 기업, 교육기관을 순환체로 두며 굳건해지고, 수많은 조민을 양산한다. 우리 모두 힘들다라는 자각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왜 힘든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바꾸어야하는지는 배운 적도 없고 고민도 부족하다. 저자는 대학에서, 나아가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빼앗긴 대학을 탈환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 학생, 교수가 함께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는 대학을 교육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저자는 생각하지 말고 행동 먼저 하라고 조언한다. 행동은 생각을 촉구하지만 생각은 행동을 유보토록 한다. 거듭된 실천 속에서 가치판단의 준거가 발생한다는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 “편에 서서 선을 넘자” 대학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홀로 선을 넘으면 잡범이지만 모두가 선을 넘으면 저항이다. 구성원 모두가 정치적 주체로서 연대하여 편에 서고, 함께 대학과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여 선을 넘자. 이해람 기자
제 677 호 [교수칼럼] 늠름하고 아름다운 우리 땅 ‘독도’, 반드시 수호해야
윤지원 교수 (국가안보학과)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외교안보 상황 하에서 우리군은 ‘동해영토수호훈련’을 실시했다. 지난 8월 24일과 25일 이틀간 훈련에 대해 국방부는 “이번 훈련은 우리 영토 수호를 위한 정례적인 훈련으로 특정 국가나 특정 세력이 대상이 아닌, 우리 주권, 영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거나 또는 침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훈련”이라고 강조했다. 독도 훈련은 1986년부터 1년에 두 차례씩 독도 방어 의지를 보여주고, 외부 세력의 독도 침입을 차단하는 전술을 숙달하기 위해 해군, 해경, 공군 등이 참가하는 일종의 방어훈련이다. 작년에는 6월 중순과 12월 초에 실시됐다. 올해 훈련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훈련 시기인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직후에 실시됐다. 훈련 명칭은 기존의 ‘독도방어훈련’에서 ‘동해 영토수호훈련’으로 변경됐고, 훈련 규모가 상당했다. 이지스구축함·육군 특전사 병력 등이 동원됐고, 이틀째에는 일본 극우단체 선박 등이 무단으로 진입한 상황을 가정해서 해경 경비함정 4척, 해군 함정 5척 등이 투입된 훈련을 실시했다. 2차 훈련 시기는 곧 정해질 예정이다. 예상대로 우리군 훈련이 끝나자마자 일본의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맞대응하듯이 일본 자위대가 미 육군과 한 달 동안 전시증원 연합훈련에 들어갔다. 미·일은 이례적으로 연합훈련을 공식화했다. 미·일 전시증원 연합훈련은 “유사 시 미군 전력이 투입되는 절차 등을 훈련하는 것으로 미 본토 또는 하와이, 기타 지역에 있는 미군들이 현장으로 증원하고 전개하는 전반적인 절차를 연습하는 훈련”이다. 그동안 미·일 정례 합동훈련은 주로 일본 동북부에서 실시됐지만 이번에는 부산과 3백km 떨어진 우리 영토와 가장 근접한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훈련에 들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독도 영공 수호를 포함해 튼튼한 국가안보 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지난 7월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영공을 2차례나 침범한 사례가 발생했다. 우리 공군의 군사적 대응은 단호했다. 러시아의 독도 무단 영공 침범에 즉각적인 경고 사격을 가했다. 러시아는 우리와 1990년 9월 30일 수교 이후 2008년 9월부터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갑작스런 이런 독도 침범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이고 용납할 수 없는 주권 침해 행위”이다. 정부는 러시아의 군사적 도발 행위에 대해 엄중한 항의와 재발 방지 약속을 촉구했다. 동북아 지역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독도는 동도와 서도, 바위와 암초로 구성된 우리 고유의 땅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 대신 연중 방문할 수는 없는데, 기상악화로 파고가 높을 경우 독도 방문이 제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며, 방문 시간은 대체로 30분 내외다. 필자는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으로 몇 년 전 국방부 제공 군수송기를 타고 다녀왔다. 독도의 땅을 처음으로 밟았던 그 감동적인 가슴 뭉클했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독도의 날’을 기억했으면 한다. 역사적으로 1900년 10월 25일에 고종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공포했다. 공식적인 국가기념일은 아직 아니지만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2000년 독도 수호 운동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독도의 날 지정을 제안한 이후 2010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독도학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민간 차원에서 독도의 날을 선포했다. 이어 2004년 울릉군이 ‘울릉군민의 날에 관한 조례’를 통해 10월 25일을 ‘군민의 날’로 정했고, 경상북도 의회는 2005년 6월 9일 조례안을 가결하여 매년 10월을 ‘독도의 달’로 지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반면 독도에서 가장 근접한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2005년부터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명칭)의 날’을 제정해서 매년 2월 22일에 기념행사를 개최 중이다. 또 일본은 2008년 7월 14일 공식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는 주장을 교과서에 명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미 보도됐듯이, 일본은 2020 도쿄 올림픽, 패럴림픽 조직위원회의 홈페이지에서 일본열도 지도에 독도와 쿠릴열도 4개(러시아와의 해양영토 분쟁 지역)의 섬을 자국 영토로 표기했다. 일본의 이런 터무니없는 독도 영유권 주장을 우리는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강조하자면 독도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이다. 또 일본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정부는 국가의 주권과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 독도에 대한 어떤 도발이나 무단 침범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국민의 독도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며, 우리군은 전방위 해양안보 위협에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기위해 해양력 강화에 더욱 주력해야한다.
제 677 호 [사설]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화합의 길은 이리도 험난한 것인가? 나라 안팎으로 무역 분쟁, 국가간 갈등, 보수와 진보간의 균열 등으로 시끌시끌하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북정책, 소득주도성장으로 파급된 경제정책,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이 끝이 없다. 우리나라의 중심부라 할 만한 광화문. 어느덧 모든 희망과 욕망의 분출구이자 집결처가 된 광화문광장에서는 상시적으로 기습집회가 열리고 있다. 자고 나면 시위를 위한 천막이 늘어나 있고, 확성기 소리는 높아져 있다. 참다운 소통과 휴식의 공간이 되어야 할 ‘시민의 품’이 시위의 현장이자, 천막농성의 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광화문은 수많은 군중의 민의가 모이던 곳이요, 우리나라의 초기 민주주의가 싹터 나오던 곳이다. 광화문에서 덕수궁 앞 시청까지 이르는 길은 최초의 시민단체로 출범한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민의를 수렴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근대적 의회설립을 허락하지 않는 고종황제를 상대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던 곳이요, 이름 없는 필부들이 돈을 갹출하여 시위대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민의를 성숙시켜 나가던 곳이요, 그 결과 의회설립을 허락받아 근대적 시민사회로 한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된 상징적인 곳이다. 당대 역사는 인민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안착되지 못했지만, 진보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구호와 열망이 폭발적으로 움터 나오던 곳이다. 그 역사를, 역사의 현장을, 역사의 정신을 ‘촛불혁명’이 이어받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더 나은 사회, 품격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광화문은 지금 갈기갈기 찢어진 채 분열되고 있다. 세월호 추모 천막을 둘러싼 갈등에 이어 우리공화당의 천막, 민노총의 천막처럼 상시적인 것 외에도 정치사회적 이슈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천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천막정치’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시민들의 울화감, 냉소, 정치적 외면, 상대편에 대한 공격성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광장은 이념과 성향을 떠나 모든 시민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념과 성향이 다른 각각의 집단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무분별하게 농성하고 광장을 점유해도 괜찮은 것인가? 시민의 권리라는 이유로 냉대와 야유와 고함질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을 조율해 나갈 지혜로운 해법은 없는 것인가? 달리 생각해보면 이는 비단 광화문광장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직장이나 대학사회 내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발생되는 불협화음들이다. 근무연차가 다르고, 위계가 다르고, 소속과 계열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상대를 짓밟고 무시한다. 상대가 가져갈 이득 보다 내가 챙겨야 할 권리와 이득이 더 중요하다. 소속집단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놓은 동량들은 무책임, 무원칙, 무소신으로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하다. 규정은 있으나 마나요, 온갖 집단에서 갑질이 난무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려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바깥세상 역시 민족주의의 파고를 넘어 세계시민주의로 나아가자 제창하건만 역사는 진보하지 못하고 되레 뒷걸음쳐 무수한 갈등을 뿌리내린다. 미중간의 무역전쟁은 세계경제 침체위기로 이어지고 있고, G2 국가간의 대립은 신판 제국주의의 충돌이라 할만하다.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로 촉발되기 시작한 한일간의 갈등은 외교를 넘어 경제로, 안보문제로 증폭되고 있다. 이 와중에 일본은 헌법을 수정하여 ‘보통국가’의 길을 걷고자 한다. 사실상 군사대국화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 한말의 정국을 보는 듯 끔찍한 기시감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린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다시 서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수많은 관료들의 무책임도 문제였지만,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고종의 온유한 리더십이 더 큰 문제였다. 우선 우리 안의 균열과 대립이라도 마감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열의 언어와 작별하여야 한다. 다름을 이유로 거부하고 차별하는 편협한 사고를 경계하여야 한다. 교묘한 언어적 수사의 가식성에 대해, 도덕의 가면을 쓴 위선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으로 사회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청년층이 두터워야 한다. 깊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대립과 갈등, 균열, 전쟁과 같은 싸움을 종식시킬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리더십이 소환되어야 한다. 치열했던 여름은 가고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시작’에는 모두의 희망이 담겨 있다.
제 677 호 [상명만평] 물러설 수 없는 전투
만화학과 황인선
제 676 호 [상명만평]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황인선(만화 3)
제 676 호 [교수칼럼] 완벽한 교수, 그저 그런 교수
배희분 교수 (복지상담대학원 아동청소년상담학과) 아동과 청소년의 심리적, 행동적 문제를 다루는 상담실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부모의 말은 “선생님, 도대체 우리 애가 왜 저러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유를 좀 알려주세요!”라는 간절한 호소일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상담이 수많은 고비를 넘어 드디어 “아하, 우리 아이가 아니라 제가 문제였군요. 제가 더 좋은 부모가 돼야겠네요!”라는 부모의 고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자녀 문제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부족하던 부모가 문제에 있어 자신이 끼친 영향력을 알게 되고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 왜 ‘모든’ 경우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부모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자녀의 ‘문제’보다는 아이와 부모 간의 ‘관계’에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사람들이 상담실에 올 때 가지고 오는 호소문제들은 보다 근원적인 갈등이나 어려움이 현실과 일상에 표출되는 일종의 증상에 불과한 일이 많다. 여러 가지 상담이론들 중에 인간사에 있어 온갖 어려움이 모두 관계에서 오는 것이며, 관계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욕구라고 보는 이론이 대상관계이론이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부모와의 초기 상호작용에서 경험한 것들이 자녀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이 그 사람의 이후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즉 태어나서 맨처음 만나게 되는 양육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전 생애에 걸쳐 타인을 지각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본적인 구조가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대상관계이론의 중요한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생전에 엄마와 아이 약 6만여 쌍을 관찰하고 연구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아이를 망치고 힘들게 하는 엄마는 놀랍게도 우리 모두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 즉 자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 안은 채 모든 필요를 앞서서 미리미리 채워주는 엄마라고 일갈했다. 위니컷에게 있어 좋은 엄마는 퍼펙트 마더가 아니라, 아이에게 사랑과 돌봄도 주지만 동시에 살다보면 으레 겪을 법한 적절한 좌절도 주는 엄마인 굿 이너프 마더(good enough mother),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저 그런 엄마’, ‘그냥 괜찮은 엄마’, 혹은 ‘그만하면 충분한 엄마’라고 결론 내렸다. 사실 완벽한 부모란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완벽해지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쏟다보면 정작 그러한 노력이 목적해야 할 자녀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진짜 좋은 엄마는 아이에게 적당한 좌절을 주어서 그 좌절을 통해 자녀가 자신만의 힘을 발견하고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가지게 해주는 엄마다.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지 않는 엄마, 그저 늘 그 자리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은 엄마, 아니 바쁠 땐 가끔 자리를 비우기도 하지만 곧 돌아올 거란 믿음을 주는 엄마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문득 자녀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그 문제에 대한 이해도 통찰도 없었던 부모가 상담을 통해 부모로서 자신이 부족했음을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의 자녀 문제가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더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자칫 굿 이너프 마더가 아니라 퍼펙트 마더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적 결심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아이의 욕구를 다 채워준다는 미명하에 실은 부모 자신의 욕구를 자녀에게 투사하는 부모가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그들은 흔히 “도대체 뭐가 문제니?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잖아.”라고 말한다. 어려운 형편에 비싼 개인 과외며, 바이올린 교습이며, 발레수업을 시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것도, 심지어 고기 먹고 나면 반드시 밥도 한숟갈 먹어야 속이 편하다며 도리질하는 아이 입에 밥을 떠먹이곤 했던 것까지도 실은 자녀의 욕구와는 거리가 먼, 투사된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위험은 비단 부모-자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자칫 퍼펙트 프로페서가 되고자 하는 욕구로 자신과 제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의 사랑과 칭송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교수, 존경받는 교수가 되기 위해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밀어붙이다 보면 자신의 욕구와 제자의 욕구를 혼동할 수도 있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업적과 성과를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높은 윤리적 잣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직종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오히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좋은 관계의 기본은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좋은 자질과 함께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까지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교수에게도 필요하다. 강의평가는 우수하지만 논문쓰기가 어려운 사람도 있고, 연구 업적은 뛰어나지만 학생들과 소통이 유난히 힘든 사람도 있다. 자신의 굿(good)과 배드(bad)를 잘 통합하여 인식하는 교수가 학생들의 굿과 배드도 통합하여 볼 줄 알며, 이렇게 통합된 사제관계 속에서 비로소 교수는 학생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저 그런 교수, 그만하면 충분한 교수도 괜찮다.
제 676 호 [사설] 책을 보는 세상에서 책을 읽는 소중함을 잃지 않아야
독서는 ‘읽을 讀(독)’, ‘책 書(서)’, 글자 그대로 ‘책 읽기’를 의미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자 ‘지혜의 원천’으로 알려져 왔고 그만큼 중요하고 필요한 행동 양식 으로 인식되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곧 미덕이다. 점토판과 파피루스 두루마리책을 책의 원형으로 본다면, 책이 존속한 시간은 최소 5000년이 넘으며, 미디어로써 대중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구텐베르그의 42행 성서 발행을 기준으로 해도 6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가장 강력하고 친숙한 정보전달 미디어로 기능해 왔다. 인간은 삶을 위한 지식을 배우고 지혜를 얻기 위하여 책 읽기를 지속해 온 것이다. 책 이후에 등장한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이 음원 서비스, VOD 서비스, OTT 서비스 등으로 기능이 분산되는 경향을 보이는 현재까지도, 책은 비교적 변질되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물론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의 상용화, 디지털 정보의 생산, 유통, 보급이 활발해 지면서 ‘종이 없는 도서관’, ‘벽 없는 도서관’이 등장할 것이라는 (적어도 도서관계의 입장에서는) 우려스러운 논쟁거리로 격앙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종이책도 도서관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매년 종이책의 출판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도서관은 메이커스페이스와 같은 새로운 정보환경에 대비한 다양한 공간을 디자인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독서에 대한 몇몇 조사결과를 미루어 보면 종이책 독서 활동이 저조함을 알 수 있다. 2017년 발표된 좥국민독서실태조사좦 결과에 의하면 책 읽는 인구는 줄어들고 있으며, 성인은 일상 때문에 그리고 학생은 학업 때문에 독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책을 대체하거나 책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미디어의 활용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연간 종이책 독서량은 초등학생 67.1권, 중학생 18.5권, 고등학생 8.8권, 성인 8.3권으로 지난 2년 전 조사에 비하여 꽤 하락한 수치이다. 전자책 독서량 역시 활발한 편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양한 미디어가 등장하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다양해져서책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의존성이 적어진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정보를 추구하지 않거나 활용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기존의 독서가 갖는 장점을 자칫 잃어버릴 위기를 맞이했다고 보기에는 충분한 데이터이다. 전자책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종이책의 위상에 또 한번 위기를 예고한다. 왜냐하면 전자책은 젊은 세대에 익숙한 정보기기를 활용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책에서 파생된, 정보기술의 집약된 형태의 미디어인 이 전자책은 처음에는 종이책의 내용을 컴퓨터 모니터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형식이었다. 그러나 현재는표준화된 포맷을 이용하여 제작되어 유통 판매되고 있는 주요 미디어 중 하나이다. 같거나 유사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전자책과 종이책의 사용성을 비교한 연구가 다수 있다. 연구의 결과를 보면 종이책은 깊이 있는 내용 이해에 유리하고 전자책은 직관적이고 사실적인 정보 전달에 유리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점을 두고 우리는 종이책은 ‘읽는다’라고 하고 전자책은 ‘본다’라고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전자책 읽기는 전통적인 독서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기관과 도서관에서도 여전히 전통적인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온북 읽기’, ‘한 도시 한 책 읽기’, ‘독서토론’, ‘글쓰기’ 와 같이 (종이)책으로 이용자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노력은 꾸준히 그리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전자책과 같은 정보기기를 통한 정보 전달에 익숙한 세대를 위해서는 ‘문장을 샘플링하여 어울리는 이미지와 함께 SNS로 공유하기’, ‘SNS에 짧은 리뷰 공유하기’와 같은 방식으로 책의 의미를 전달하는 이벤트를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종이책을 읽기 어려운 세대에게는 반가운 방식이지만, 이미지로 책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식으로든 책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지속되려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며, 독서가 활용되는 교육 프로그램이 대폭 늘어나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독서량이 성인이 되면서 8분의 1로 줄어든다는 것은 단지 시간이 없다는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의지가 생길수록 좋은 것을 수행함에 따르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던 것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며, 일상에서 해야 하는 동기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SNS에 리그램을 하며 감성에 빠지며 맥락을 놓친 한두 줄에 감동하는 것은 진정한 독서라고 보기 어렵다. 책을 보는 세상에 와 있지만, 책을 읽는 소중함을 잃지 않도록, 교육프로그램 안에서 독서가 중요한 수단이 되도록, 그리고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구체적 의미를 체득하도록 교육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제 676 호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교육부터 변화해야한다
미투 운동이 진행되면서 수면 밑에 감춰있던 부조리한 사건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를 통해서 우리 사회 속에서 은근히 용인되었던 차별적인 발언과 성추행들이 잘못됐다는 걸 확실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피해자는 더는 숨지 않고 용기를 내도된다는 것을 알려줬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는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차별적인 시선과 발언들이 남아있다. 또한 스쿨 미투의 경우에는 학교에서 숨기기 급급해 묻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전히 교내에서는 차별적인 표현과 잣대가 학생들에게 행해지고 있다. 이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교육은 오랫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학교 성교육의 내용은 교사 재량으로 가르치기에 교사의 역량에 따라 성교육의 질이 달라진다. 교사가 성에 대한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감독하고 제재할 제도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또한 형식적인 형태로 진행돼서 교사의 차별적인 시선은 그대로 성교육에서 드러난다. 또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주로 보건, 기술·가정 과목에서 성교육을 하는데 보건 과목은 학교의 재량으로 선택되는 선택과목이기에 보건 과목을 선택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성교육을 받지 못 한다. 또한 그 과목이 선택돼서 성교육을 하더라도 형식적인 부분이 많다. 그리고 기술·가정의 경우에도 성교육을 임신과 출산으로만 엮어 가르친다. 학교에서는 성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우리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성교육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보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하지 않거나, 따로 성교육 과목을 만들어야한다. 또한 기술가정에서는 성교육을 임신과 출산으로만 엮을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제대로 성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학습목표를 세워야한다. 또한 성교육을 교사의 역량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하고, 교육의 내용을 제도화시켜 학생들이 배워야할 것들을 꼭 배우고, 성교육에서 잘못된 인식을 배우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다른 과목들도 중요하지만 성교육은 특히 중요하다.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몰라서 못 가르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해 성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지 못 하고 ‘성’을 놀림거리로 삼거나 무분별하게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 시선들이 아이들에게 흡수되어 아이들도 차별을 내면화 하게 된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교육이 꼭 필요하다. 잘못된 생각을 흡수하더라도 교육을 통해 그것이 잘못됐다는 걸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교육에서는 그러지 못 하고 있다. 현재 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스스로 변화를 이룩하고자 스쿨 미투를 통해 잘못된 발언 바로잡고, 학교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 속에 학생들은 성교육의 변화를 간절하게 요구했다. 우리는 그 요구를 들어야 할 때이다. 학생들이 발 담고 있는 사회에 차별적인 시선과 행동이 만연하지만 이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바른 시선을 갖도록 만들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 작은 변화는 성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로 나갈때 조금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제 675 호 [기자석] 연구·회계비리에 파산까지, 사학 변화해야
작년 10월 2일 취임한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지난 5월 7일 “문재인 정부 3년 차를 맞아 사학혁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며 교육부의 사립대학 감사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교육부는 교수가 미성년 자녀를 공저자로 등재하거나 해외 부실학회에 참석한 사안에 대해 15개 대학을 대상으로 특별감사를 실시하며 이번 6월 고등교육 혁신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지난 5월 7일 교육부가 발표한 고려중앙학원 및 고려대학교 회계부분감사를 통해 교직원 퇴직 선물비용과 유흥주점 및 단란주점 비용을 교비회계에서 지출한 것이 드러났다. 이에 고려대 학생들은 “대학 본부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등록금 돌려내라”며 항의했고 교육부의 ‘사학비리 근절’ 기조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교육부는 그 일환으로 교육부와 소속·산하기관, 사립대 등 감사에 전문가 단체 및 협회 등의 추천을 받은 사람과 일반 국민 중 공개모집을 통해 선발된 15명을 시민감사관으로 위촉하는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적 쇄신이 의미하는 바가 없진 않겠으나 교육부가 말하는 ‘사학 혁신’의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균등한 시민교육의 발전과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하는 것이 교육부의 역할이지만 “국민은 개돼지”라고 발언하며 그 기능을 교육부 고위공직자가 스스로 부정한 이후에도 교육부는 자기 몸에 흠집 내길 계속했다. ‘사학 비리’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슈가 아니었다. 1963년 사학법이 제정된 이후 끊임없이 개정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현재진행중이다. 법인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사익만 추구한다는 지적은 일견 맞는 말이고 자체적인 개혁도 필요하지만 사학 사회 내의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은 행정부와 제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부는 사과나무 아래 누워 사과가 떨어지길, 썩은 우물에 가만히 걸터앉아 알아서 맑아지길 기다리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난 5월 22일 명지대학교 법인인 명지학원은 분양대금을 갚지 못해 채권자에 의해 파산 신청을 당해 재학생들은 학교의 존폐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교육부는 “파산 선고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법원에 전했지만 만약 법원이 파산 선고를 할 경우 명지학원과 법인이 운영하는 명지초·중·고와 명지대, 전문대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학원회계가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대학운영에 사용되는 교비회계는 법인과 별개이기 때문에 폐교될 가능성은 낮다. 이번 명지학원 파산 문제도 사학계의 구조적 문제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2007년 명지학원 이사장이 교비 727억여 원을 횡령하고 재단에 1,735억여 원의 손해를 끼쳐 2012년 횡령 및 배임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사학 비리 문제가 매년 쏟아짐에도 교육부는 적극적인 대책 및 감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번 고려대 교비 횡령에도 학교 당국은 대부분 주의·경고로 마무리했다. 혁신위원회를 구성하여 회계비리 재발방지 방안을 강구하고 내부통제 시스템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교육부와 학생 모두 지켜볼 필요가 있다. 보도에 따르면 교육부가 감사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를 비롯한 사립대학 111곳이 종합감사를 받은 적 없다.명지학원 감사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이러한 부채 상황을 알았으나 ‘기관 경고’에 그쳤고, 법인에 해결책 마련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 신청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지난 24일 교육부 정책연구 보고서 ‘사립대학 개혁방안-부정·비리 근절 방안을 중심으로’가 서울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7월 기준 28개 대학에서 설립자의 손자·손녀가 3대 이상 이사장이나 총장 등을 맡고 있다. 이중 경성대, 고려대, 우송대는 4대째 대물림 중이며 전국 299개 사립대 학교법인 중 설립자, 임원, 총장 친인척이 교직원 등으로 근무하는 학교는 194개교(64.9%)이다. 이 보고서는 후손의 운영권 독점이 비리의 요인 중 하나이며, 친인척 비율 제한을 강화하는 등의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고려대나 명지대 사태를 계기로 드러난 문제는 학교당 수천, 수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교직원의 이익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시민감사관제도 도입, 종합감사 등 감사 강화로만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교육부의 지나친 사학 개입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교육부 역시 사학의 감사가 교육부가 주도하는 대학 구조조정과도 유리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였던 사립대 공영형 전환도 사실상 무산되면서 유은혜 장관이 언급한 문 정권의 ‘사학 혁신’이 커다란 기조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유은혜 장관은 여러 차례 사학비리를 철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구조적 문제 해결정책을 내놓진 못했다. 따라서 정부는 학생과 교직원의 권리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국공립대와 ‘부패사학’을 혁신하면서 사학과 교육부의 균형을 지킬 수 있는 고등교육 혁신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제 675 호 [상명만평] 가정의 달은 마지막까지
황인선 (만화학과 3)
이 사이트는 자바스크립트를 지원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수 있습니다.